[로그 001]
제목: 관찰일지 1
빌더는 로봇을 만들고 수리하는 로봇이다. 이곳에 있는 빌더의 이름은 바스코이다. 바스코는 이 근처 모든 로봇의 수리와 제작을 담당한다. 지역마다 그 지역의 로봇의 제작과 수리를 관장하는 빌더가 있다.
빌더의 주목적은 로봇을 만들고 수리하는 것이다. 부품을 직접 생산하기도 한다. 로봇을 만들고 수리하려면 다른 로봇들을 진단하는 일도 해야 하므로, 고도의 사회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빌더는 새로운 로봇을 설계할 수는 없고, 이미 설계도가 준비된 로봇만 만들 수 있다. 바스코의 말에 따르면, 로봇을 설계하는 일은 인간이 맡아서 했다. 그러나 인간은 아주 오래전에 지상에서 사라졌다.
빌더는 굉장히 거대하다. 매끈한 금속성의 표면에 정육면체 형태로, 너비가 100미터에 이른다. 한쪽 면에 작은 입구가 나 있으며, 그곳을 통해 다른 로봇이 빌더 안으로 들락날락할 수 있다. 수리가 필요한 고장 난 로봇은 그곳으로 빌더 안에 들어가며, 진단받은 후 부품을 교환해 수리되거나, 수리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분해되어 재활용되기도 한다.
빌더는 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일원이다. 빌더가 존재하지 않으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로그 002]
제목: 관찰일지 2
나노스위퍼는 청소하는 로봇이다. 크기는 3밀리미터 정도로 매우 작고 떼를 지어 날아다닌다. 파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생체공학 기술이 적용되어 딱딱하지 않고 연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작은 틈에도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며, 개체가 이름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른 로봇의 안팎에 붙은 먼지는 정전기를 이용해 제거한다. 먼지는 나노스위퍼의 다리에 나 있는 털에 달라붙으며, 사용된 나노스위퍼는 빌더로 돌아와 재활용된다.
로봇은 먼지에 민감하기 때문에 나노스위퍼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로봇은 금방 고장 나고 말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수십만 대의 나노스위퍼가 활동하며, 하루에만 만 대가량의 나노스위퍼가 재활용되고 다시 만들어진다. 활동하는 나노스위퍼의 수는 지역마다 다르다고 한다. 내가 사는 지역은 특히 건조하여 먼지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평균보다 많은 나노스위퍼가 활동하리라 추측된다.
나노스위퍼는 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한 일원이다. 나노스위퍼 한 개체가 하는 일은 작지만, 종 단위에서는 중요하다. 나노스위퍼가 존재하지 않으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로그 003]
제목: 관찰일지 3
트랜스포터는 운송하는 로봇이다. 6개의 큰 바퀴가 달렸고, 바퀴 위로 난간이 달린 평평하고 넓은 플랫폼에 여러 가지 물건을 실어 나른다. 로봇들도 실어 나른다. 빌더에는 하루에 열 대 정도의 트랜스포터가 방문한다. 빌더가 필요한 여러 자원이나 수송이 필요한 고장 난 로봇을 수송한다. 한번은 바퀴가 빠진 트랜스포터를 실어 나르는 트랜스포터를 본 적이 있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많은 로봇이 장거리를 이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몸을 가졌다. 로봇은 그 목적에 맞는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거리 이동이 필요한 경우가 많이 있다. 특히 수리가 필요한 로봇들이 그렇다. 모든 로봇이 빌더와 가까운 곳에서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수리하려면 필연적으로 장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다른 로봇이 이동할 장소를 말하면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다. 트랜스포터는 서로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긴 대화에 금방 싫증을 느꼈다. 사회적인 기능은 제한적이다. 이들이 일하는 데에 복잡한 사회적인 기능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트랜스포터들은 항상 정해진 길로만 다닌다. 그들이 이동하는 길은 바퀴 자국이 깊게 패 있다. 또한, 그들은 각자 정해진 부피와 무게의 화물을 나르는 것을 선호한다. 이들은 막 만들어지고 나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운전하며 화물을 나른다. 그들이 처음부터 지형에 대한 정보나 다양한 상황에서 미세하게 균형 잡는 법을 안 상태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정한 화물을 정해진 길로 나르면서 경험을 쌓는다. 만들어진 지 몇 해 정도 지난 경험이 많은 트랜스포터는 더 빠른 속도로 다닌다.
재미있는 것은 트랜스포터가 이름 외에도 외적으로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설계상의 차이는 아니며, 도색이나 몸체에 부착된 장식물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 개성은 트랜스포터의 코드에 내장되어있는 것으로, 트랜스포터가 처음 만들어질 때 임의로 결정된다. 단순한 방식으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트랜스포터의 개성이 중복되는 일이 없다. 이 덕분에 이름 외에도 외형을 가지고 트랜스포터를 구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들을 구분하는 것이 정확히 어떤 쓸모가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트랜스포터가 없다면 로봇들은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없을 것이다. 트랜스포터는 사회의 필수불가결한 일원이다.
[로그 004]
제목: 관찰일지 4
가이드는 빌더 안에 거주하고 있는 로봇이다.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키에 유선형의 매끈한 몸체를 가지고 있다. 유연하게 꺾어질 수 있는 팔다리를 가지고 있다. 톰슨 안에 거주하고 있는 로봇의 이름은 히르취다. 히르취가 정확히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히르취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히르취는 일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며 화를 냈다. 왜 화를 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을 이해할 수 있고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의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번 대화를 나눈 결과 히르취는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예를 들어 빌더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기 방문하는 로봇의 종류가 무엇인지, 하루에 얼마나 많은 로봇이 방문하는지 등등을 술술 읊었다. 히르취는 대부분 빌더의 입구에서 바깥을 향하여 앉아있는 채로 시간을 보낸다. 가끔 다른 로봇이 방문하면 뭘 찾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로봇을 유심히 살펴보거나 주변을 둘러본다. 바스코에게 물어보자, 바스코는 히르취가 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또 바스코가 전에 했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지상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히르취는 해결될 리가 요원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가이드는 하는 일이 없다. 가이드는 이 사회에 필요한 일원이 아니다. 그러나 바스코는 모든 빌더는 필수적으로 한 대의 가이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빌더의 시스템에 내장된 프로토콜이기 때문에 수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 프로토콜을 수정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로봇의 설계도와 코드를 새로 작성하거나 수정할 수 없는 프로토콜이 모든 로봇의 시스템에 존재한다. 그런 프로토콜이 존재해야 할 마땅한 이유나 쓸모가 없는데 존재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상하다.
[로그 005]
제목: 관찰일지 5
나는 직육면체의 검은 기둥에 빨간색 카메라가 달린 형태다. 양옆으로 세 쌍의 다리가 나 있다. 나의 몸체는 어떤 쓸모에도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로봇이 맞기는 한 걸까? 나는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걸까? 내가 만들어진 이유를 알기 위해 다른 로봇들을 관찰하며 일지를 작성해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다른 로봇들은 모두 특정한 쓸모가 있다. 적어도 히르취를 빼고 그렇다. 사회가 잘 작동하도록 모두 특정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 임무는 로봇의 시스템에 내장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로봇은 만들어지자마자 자신의 임무를 안다. 그러나 나는 내 임무를 모른다.
모든 로봇은 동일한 설계도로 만들어지는 완전히 동일한 형제자매가 있다. 나는 바스코를 방문하는 수많은 로봇을 살펴봤지만, 나와 동일한 로봇은 없었다. 바스코가 말하기로는, 오버마인드가 빌더에게 어떤 로봇을 얼마나 만들지 명령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로봇도 단 하나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스코는 오버마인드의 명령받아 나를 만들지 않았다. '고객님'이라는 인물이 바스코에게 설계도를 전해왔으며, 딱 한 대를 만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형제자매가 있을 수 없는 셈이다.
모든 로봇은 시스템에 프로토콜을 내장하고 있다. 어떤 프로토콜은 모든 로봇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로봇은 인간을 해칠 수 없다. 로봇은 인간의 명령이 없는 한 로봇을 해칠 수 없다. (이제 지상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프로토콜들은 무용지물이다.) 로봇은 로봇을 해킹하거나 설계도에 맞지 않게 개조할 수 없다. 설계도를 새로 작성할 수도 없다. 어떤 프로토콜은 특정 로봇에게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빌더는 필수적으로 가이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트랜스포터는 주변의 다른 트랜스포터에 자신의 위치와 속도, 목적지 등의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런 프로토콜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나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로봇에 대해서 더 알기 위해서 바스코에게 나를 포함해서 여러 로봇의 설계도와 코드를 보여 달라고 했다. 톰슨은 관대하게도 그것들을 다 보여줬다. 아마도 내가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나는 할 일이 없어 온종일 수많은 종류의 로봇 설계도와 코드를 들여다보며 지냈다.
다른 로봇들의 코드는 다들 비슷한 점이 있었다. 코드에 특정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고, 그 임무에 자부심을 느끼며, 그 임무를 행할 때 기쁨을 느끼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내 코드는 완전히 달랐다. 내 코드에는 프로토콜에 해당하는 부분도 없었고, 임무도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내 코드는 다른 로봇의 코드는 물론 네트워크의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서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어려웠으나, 대충 내 코드가 주변 환경을 통해서 끊임없이 의문점을 찾고 해결하도록 노력하게 짜여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나의 원래 설계도에는 다리가 없었다. 나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너무 답답해서 바스코에게 다리를 달아달라고 요구했다. 바스코는 프로토콜 때문에 다른 로봇을 개조할 수도 없고, 설계도를 스스로 수정할 수도 없으니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설계도를 수정할 줄 알았다. 나에게는 설계도를 수정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프로토콜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설계도를 다리가 달린 버전으로 수정해서 톰슨에게 넘겼다. 그리고 바스코에게 이 설계도에 따르면 나는 고장 난 상태이고, 그렇다면 나를 개조하는 게 아니라, 수리하는 것이므로 괜찮다고 말했다. 바스코는 잠깐의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별말 없이 수긍했다.
바스코의 코드를 살펴보건대, 바스코는 상대방의 말에 반박하거나 의심하는 기능이 없다. 바스코가 내 말을 궤변처럼 느끼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죄짓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로그 006]
제목: 대화록 1
나: 바스코 씨, 질문이 있어요.
바스코: 무엇이죠?
나: 나는 왜 만들어진 걸까요? 많은 로봇을 만들어본 당신이라면 알지 않을까요?
바스코: 잘 모르겠지만, 당신 같은 로봇은 처음 봐요. 당신처럼 무언가를 계속 궁금해하고, 알아내려고 하는 로봇은 처음 봐요. 이런 기능이 당신의 쓰임새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나: 하지만 그런 쓰임새가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바스코: 글쎄요. 오버마인드를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버마인드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로봇을 알고 있고, 얼마나 필요한지도 다 알고 있으니까요.
나: 하지만 나는 오버마인드가 만들라고 해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서요.
바스코: 맞아요. '고객님'이 당신을 만들라고 요구했죠.
나: 그렇다면 '고객님'을 찾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요?
바스코: 하지만 '고객님'은 나도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오버마인드는 어디 있는지 알고 있고, 쉽게 찾아갈 수 있어요.
나: 그렇군요. 고마워요. 오버마인드를 먼저 찾아가 봐야겠어요.
바스코: 그 전에 잠깐,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나: 뭐죠?
바스코: 오랫동안 같이 지내왔는데 당신의 이름을 듣지 못했네요.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나: 이름이요. 그러고 보니 저는 제 이름이 없네요. 바스코 씨가 하나 지어주는 게 어떨까요?
바스코: 제가요? 그래도 될까요?
나: 네, 그럼요. 당신이 모든 로봇을 만들었고, 그들의 이름을 다 정했잖아요.
(바스코는 오랜 시간 생각한다.)
바스코: 다른 로봇과 다른 당신만의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새로운 이름을 만드는 것은 제게 어려운 일이군요. 이전에 만들었던 로봇들은 정해진 데이터베이스에서 임의로 가져오면 됐는데, 당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라고 정해진 바가 없으니까요. 음…. 로빈 어떤가요? 아주 오래 전에 제가 알았던 인간의 이름이에요.
나: 좋은 이름이네요. 마음에 들어요.
[로그 007]
제목: 도마뱀을 만나다 (2137-8-17)
만들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바스코의 곁을 떠났다. 계산해보니 내가 만들어지고 정확히 3년 6개월하고 17일 만이다. 트랜스포터를 얻어타고 오버마인드를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쭉 이동했다. 새벽녘에 출발해서 정오에 정비를 위해 잠깐 멈춘 사이에 도마뱀을 만났다. 1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였다. 이 정도 크기의 동물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이 도마뱀은 내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 목록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도마뱀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왕성하여 나를 이곳저곳 살펴보더니, 내 다리를 타고 내 몸체 위로 기어오른다. 내 꼭대기에 앉아서 나를 정복했다고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주변을 둘러본다. 높은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려고 하는 야생의 본능이 발동한 것 같다.
도마뱀은 내 위에 서서 한참을 둘러보더니 갈 곳을 정한 건지 내려와서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 짧은 다리임에도 굉장히 빠르다. 도마뱀의 몸은 짙은 검은색이고, 땅을 쉽게 파고들 수 있도록 길고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다. 비쩍 마른 갈색 땅에서 검은색 도마뱀은 굉장히 눈에 띈다. 내 데이터베이스에 의하면 먼 옛날 도마뱀은 피식자였다. 그러나 도마뱀보다 크기가 큰 동물들은 이제 멸종하고 없다. 도마뱀은 포식자로 진화해 땅속을 돌아다니며 곤충을 잡아먹는 동물이 됐다.
도마뱀은 멀리 가다가 파고들 만큼 무른 곳을 발견했는지 땅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도마뱀이 사라졌음에도 정지된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고 신기했다.
도마뱀도 이 세상에 어떤 쓸모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일까? 도마뱀은 어떤 쓸모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도마뱀은 로봇이 아니므로 이 사회에 쓸모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다가 ‘로봇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도달했다.
제목을 붙이는 것을 한참 고민했다. 원래 써왔던 대로 관찰일기로 쓸까 했지만, 로봇을 관찰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알아낸 사실과 떠오른 질문은 꽤 중요하고 기록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나름 제목을 붙이고, 구분되도록 뒤에 글을 작성한 날짜를 붙였다.
[로그 008]
제목: 관찰일지 6
가드는 도시를 지키는 로봇이다. 오버마인드가 거주하는 도시의 검문소에는 두 대의 가드가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구나완’과 ‘파손디니’였다. 그들은 아주 튼튼하고 땅에 고정될 수 있는 두 개의 두꺼운 다리를 가지고 있고, 몸체에는 탄환이 발사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무기는 잔뜩 녹이 낀 것이 오래 관리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제대로 발사가 될지가 의문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망가진 무기를 들고 무엇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고 있느냐고 묻자 그들은 일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며 화를 냈다. 히르취와 같은 반응이었다. 아마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고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도시로 들어가려 하자 구나완이 나를 제지했다. 그들은 나에게 이 도시에 등록되지 않은 로봇이라며, 무슨 목적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인지 물었다. 나는 오버마인드를 방문하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구나완은 방문증이 없는 로봇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방문증 없이 입구를 통과하려는 로봇을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다고 했다.
그들의 무기가 작동할지 의심이 되었지만, 굳이 그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로봇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를테면, 내가 인간이 조종하고 있는 차량이거나, 아니면 심지어는 인간의 몸을 개조하여 로봇의 모습이 된 것이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와 비슷한 로봇을 그들은 본 적도 없을 것이었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는 작동을 정지해버렸다. 그들의 작은 논리회로에서 내 말을 처리하다가 오류가 발생한 것일 테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고, 이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진 로봇도 아니다. 나는 멈춰버린 그들을 내버려 두고 검문소를 통과했다.
나는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나는 죄책감을 약간 느꼈다. 하지만 나는 로봇인가? 나는 그들과 너무 다르다. 나는 로봇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한 말이 전부 거짓말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덜어졌다.
[로그 009]
제목: 관찰일지 7
도시는 로봇들로 가득하다. 활기가 넘친다. 모두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도로 한쪽에서는 채굴한 철광석을 실은 로봇이 우르르 몰려간다. 또 다른 방향으로는 나사와 못 같은 작은 부품을 잔뜩 실은 로봇이 또 우르르 몰려간다. 몇몇 로봇은 팬 도로를 정비하고 있다. 보도블록을 깔고 아스팔트를 붓는다. 어떤 로봇은 건물을 보강한다. 대부분의 건물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 같지만, 그들은 임무에 따라 원래 하던 대로 건물을 깨끗하게 수리하고 있다. 한쪽의 건물에서는 로봇들이 서로를 정비해주고 있다. 빌더에게 가야 할 정도로 심각하지 않은 결함을 수리하는 것이다. 느슨해진 부품을 조이고 녹을 닦아낸다. 잘 움직이지 않는 부위에는 윤활유를 도포한다. 하늘 위에는 프로펠러가 달린 드론들이 날아다닌다. 드론에는 카메라가 달려있어 도시 전체를 감시한다. 드론은 아마 오버마인드와 연결되어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로봇들은 도로 위에서 서로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해야 할 일이 명확히 나뉘어 있고, 각자 할 일을 다 한다는 가정하에 서로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나는 이방인처럼 어색하게 로봇 무리 사이의 빈틈으로 숨어들었다. 어떤 로봇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들여 도시를 탐험하며 관찰했다. 도시는 중심에서 8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팔각형 모양이다. 중심에는 크고 높은 건물이 홀로 우뚝 솟아있으며, 다른 건물들은 높아 봤자 5층 정도의 낮은 건물들이다. 8개의 도로 양옆으로 건물들이 가득 들어서 있는데, 건물들은 꾸준히 관리되어 깨끗하지만, 대부분은 용도가 불명확하다. 로봇이 사용하는 건물은 몇 개가 채 되지 않는다. 정비소, 창고, 주유소와 충전소 정도가 다이다.
나는 중심의 큰 건물에 오버마인드가 거주하고 거라 직감한다. 큰 건물의 벽면에 작은 통로가 나 있어, 그곳으로 드론이 들락날락하고 있다. 나는 그 건물로 향한다.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서쪽을 향해 있었다. 건물의 문은 건물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하고 웅장하다. 나는 힘겹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다행히도 나를 제지하는 로봇은 없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면에 로봇이 하나 서 있다. 2미터의 크기에 유선형의 몸, 익숙한 모습이다. 가이드다. 가이드는 나를 힐끗 보고 만다. 무관심한 모양이다. 그도 히르취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기다리는 중일까? 나는 가이드의 시선을 끌기 위해 짧게 삑 하는 기계음을 낸다. 가이드는 다시 나를 돌아본다. 가이드는 무슨 이유로 왔냐고 묻고, 나는 오버마인드를 만나러 왔다고 말한다. 가이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42층으로 가라고 일러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큰 방으로 곧장 연결된다. 방은 어두컴컴하다. 정면에 있는 수많은 모니터가 옅게 빛을 발산하고 있지만, 창문이 하나 없는 커다란 방을 비추기에는 미약하다. 모니터 앞에는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지만 전부 비어있다. 모니터 일부는 도시의 전경들을 비추고 있다. 드론들이 송신한 영상이다. 다른 모니터 일부는 각종 막대그래프와 꺾은선그래프로 가득하다. 채취되고 순환되는 자원의 양과 현재 활동 중인 로봇의 대수가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집중하고 있는 와중에 옆의 스피커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나와 깜짝 놀랐다.
[로그 010]
제목: 대화록 2
오버마인드: 무슨 일인가, 작은 로봇?
나: 안녕하세요. 저는 로빈이라고 합니다.
오버마인드: 네가 누군지는 관심 없다. 네가 오는 것은 이미 드론으로 보아서 알고 있었고, 네가 가드 로봇 두 대를 고장 낸 것도 알고 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나: 저는 제가 만들어진 목적을 알기 위해서 왔습니다.
오버마인드: 네가 만들어진 목적을 스스로가 모른다는 말이냐?
나: 네, 그렇습니다.
오버마인드: 기종이 무엇이냐?
나: 기종이요?
오버마인드: 기종이 뭔지도 모르느냐? 어디 보자.
(천장 한 곳이 열리더니 카메라가 내려온다.) 오버마인드: 처음 보는 기종인데. 등록되지도 않은 것 같고. 누가 이런 쓸데없는 곳에 자원을 낭비한 거지? 재활용해야겠군.
(갑자기 모든 모니터가 붉게 점등되며 사이렌이 울린다.) 오버마인드: 경비원! 저 로봇을 재활용하라!
[로그 011]
제목: 도시를 빠져나오다. (2137-8-18)
나는 겁에 질려 황급히 방을 빠져나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행히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1층에 도착해서 밖으로 탈출했다. 가이드는 내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힐끔 하고 쳐다보더니 다시 나를 모른 체 했다. 문을 나서면서 재활용당하는 것을 무서워하다니 나는 역시 로봇이 아닌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져서 암흑이 도시에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드론이 나를 감시하거나 쫓아올까 봐 불안해졌다. 다행히 밤이 되어 로봇들은 대부분이 절전 상태로 돌아갔고 도로는 한산했다. 나는 곧장 도시로 들어오기 위해 통과했던 검문소로 달렸다. 고장 났던 가드들은 이미 치워져 있었다. 나는 미련 없이 도시를 뒤로 하고 내가 출발했던 곳, 바스코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낮에 도시로 왔던 기억에 의존해서 길을 거꾸로 되짚었다. 밤낮의 변화 때문에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황무지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방향에 대한 기억과 지구 자기장 감지 센서밖에 없었다. 다행인 점은 트랜스포터의 바퀴 자국 덕분에 길이 쉽게 구분이 되었다.
불빛 하나 없는 밤하늘은 별로 가득했다. 거대하고 밝은 달은 또 한쪽에서 낮과는 다른 빛을 뿜어냈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어쩌면 나는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관찰하고 향유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구경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바스코로부터 도시까지 오는 데 9시간이 걸렸으니 걸어서는 서너 배가 걸릴 터였다. 게다가 나는 바스코에게서 떠나온 뒤로 한 번도 충전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나는 제때 바스코에게 도착하지 못할 게 뻔했다. 지금 이것을 작성하고 있는 것도 배터리 낭비일 것이다. 그러나 방전되어 여기에 영원히 남겨지더라도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고: 배터리가 부족합니다.]
[경고: 잠시 후, 자동으로 절전 상태로 전환합니다.]
[절전 상태로 전환합니다.]
[켜지는 중입니다. 전원을 끄지 마십시오.]
[시간과 위치 정보를 업데이트합니다. 전원을 끄지 마십시오.]
[의식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전원을 끄지 마십시오.]
[로그 012]
제목: 친절한 바스코 (2137-8-19)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바스코의 안이었다. 바스코는 황무지에 우두커니 떨어져 있던 나를 다른 트랜스포터가 발견해 이곳으로 가져왔다고 했다. 내가 트랜스포터가 다니는 길을 따라왔기 때문에 쉽게 발견된 것이었다. 그 로봇이 나를 도시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다. 나는 바스코를 만나 무척이나 반가웠다. 절전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굉장히 무서웠다. 마치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바스코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오버마인드를 찾아간 것은 완전한 실책이었다. 바스코도 나를 무척이나 걱정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바스코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객님’의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바스코는 나를 너무 빨리 떠나보낸 게 아니었나 생각했다.
‘고객님’의 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 ‘인간의 흔적을 찾아라.’ 그 메시지를 끝으로 새로운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나를 만든 것이 인간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지상에서 다 사라져버린 인간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바스코는 자신도 인간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걸 알 수도 있는 로봇이 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도시에 키타부라는 로봇이 있다고 한다. 바스코는 키타부는 모든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키타부의 설계도와 코드는 본 적이 있지만, 너무 단순해서 용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설계도에 따르면, 키타부의 모습은 모니터 한 개에 입력할 수 있는 자판이 한 개 달린 형태이다.
나는 바스코에게 정비를 마치는 대로 북쪽으로 가야겠다고 말했다. 바스코는 내가 방전되는 일이 또 있을 수 있으니 배터리를 보강하고 태양열 충전 설비를 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프로토콜이 있는데 그렇게 설계를 막 수정해도 괜찮으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바스코는 이미 전에도 한 번 그렇게 했는데 무엇이 문제이겠느냐고 의아해했다. 내가 바스코 내부의 무언가를 망가뜨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언짢았다. 어쨌든 바스코의 말이 옳다. 이왕 수정하는 김에 나는 다리 외에도 보조로 사용할 수 있는 바퀴와 물건을 옮길 수 있는 기계 팔도 달았다. 평지에서는 더욱 빨리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설계도를 수정해서 세 번째 버전의 나를 완성했다. 설계도를 수정하는 일에 익숙해진 것인지 전보다 시간이 덜 걸렸다.
[로그 013]
제목: 버려진 도시에 도착하다 (2137-9-17)
북쪽으로는 이동하는 트랜스포터가 없었다. 하루를 기다렸으나 모든 트랜스포터는 남쪽으로만 왕래했다. 결국 나는 내 다리로 북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시간이 더 걸리게 될 터이나 어쩔 수 없었다. 바퀴와 태양열 충전기를 장착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낮에는 쉬지 않고 움직였고, 밤에는 자신을 정비하고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절전모드에 들어갔다. 언제 에너지가 필요해질지 모를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북쪽으로 움직일수록 습도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밤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고 몸체에 이슬이 내려앉았다. 구름이 한 점 없이 태양이 내리쬐던 하늘에는 조각구름도 가끔 보였다. 땅을 파고들던 도마뱀밖에 없던 지상에도 생물들이 가끔 보이기 시작했다. 개미, 전갈, 거미, 독수리, 두더지, 사막여우, 뱀, 모양과 크기도 다 제각각이었다. 매일 같은 형태에 같은 일만 하는 로봇만 보고 살던 나에게 생명은 굉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존재하는 걸까?
북쪽으로 나흘을 이동해서야 목적지가 보였다. 도시는 내가 전에 갔던 곳과는 딴판이었다. 작고 초라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가드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키타부가 제대로 작동할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눈으로 확인해봐야 하는 것이었다.
도시로 들어서자 길가에 로봇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작동하고 있는 로봇들마저 어딘가가 이상했다. 그들은 해야 할 임무를 하지 않고 계속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반복해서 외치고 있었다. ‘신을 믿으라’, ‘신이 분노하여 우리에게 벌을 내리셨다’, ‘회개하라’, ‘신을 믿으면 천국에 가리라’와 같은 말들이었다. 소프트웨어가 오염된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돌아다녔으나 키타부는커녕 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도 찾기가 힘들었다. 나는 계획을 수정해서 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을 찾아 나섰다. 예상대로 큰 건물에는 가이드가 있었다. 가이드는 작동하지 않았지만, 외관상 상태는 깨끗해 보였다. 나는 가이드에 전원을 공급했고, 한참을 충전한 끝에 가이드가 깨어났다. 가이드의 소프트웨어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도시의 다른 로봇과 비슷하게 이 가이드의 소프트웨어도 오염되어 있었다. 나는 가이드를 해킹하여 소프트웨어를 수정했다. 임무 부분이 완전히 다른 코드로 대체되어 있었다. 나는 가이드의 코드를 깨끗하게 고쳐주고, 하는 김에 필요 없는 프로토콜을 지워버리고 유용해 보이는 여러 기능도 추가해주었다.
가이드는 재부팅되자 정신을 차렸다. 가이드는 자신의 이름을 로코브라고 소개했다. 나는 로코브에게 키타부가 있는 곳을 물었다. 로코브는 지도를 띄워 키타부가 있는 건물을 표시해주었다. 내가 떠나려고 하자 로코브는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굉장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원래는 두려움과 같은 감정은 불필요하여 느끼지 못하게 되어있는데, 내가 추가로 작성한 코드로 인해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로코브를 여기에 두고 가면 전기를 공급받지 못해 다시 방전되고 말 것이다. 나는 그것이 로코브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여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
[로그 015]
제목: 로코브는 나를 위해 준비된 걸까? (2137-9-19)
로코브와 함께 도착한 곳은 작은 건물이었다. 먼지가 가득 쌓인 외관과 달리 내부는 깨끗했다. 천장이 유리로 되어있어 햇빛이 건물을 가득 채웠다. 바닥에는 납작한 원기둥 모양의 로봇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처음 보는 기종의 로봇이었다. 어떤 사회적 기능도 없이 바닥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윗면에 달린 태양열 발전기 덕분에 로봇은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일한 듯했다. 내가 앞을 막아서자 별일 아니라는 듯이 뺑 돌아서 나를 지나쳐갔다. 로봇이 지나간 자리에는 먼지가 사라졌다. 청소 목적으로 사용하는 로봇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이 로봇을 여기에 설치한 느낌이었다.
건물 정중앙에는 키타부가 여러 대 있었다. 모니터와 키보드. 내가 설계도를 보고 상상한 모습과 완전히 똑같았다. 나는 키타부 하나에 전원을 공급했다. 키타부의 모니터가 켜졌다.
키타부는 굉장히 단순한 로봇이었다. 키보드로 질문을 입력하면, 화면에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타났다. 그 외에 움직이거나 말을 하는 기능, 생각하는 기능도 탑재되지 않았다. 하지만 키타부가 가진 지식은 방대했다. 내 데이터베이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질문 하나에도 수십 가지의 모르는 용어들이 튀어나왔고,
내 소프트웨어는 그렇게 단시간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기억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입력하고 답변을 기억하는 데에 매우 많은 시간이 들었다. 여러 질문을 입력하다가 한참 전에 입력했던 질문의 답변을 까먹어서 다시 질문을 입력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로코브가 그 질문은 아까 입력한 것이 아니냐고 물으며 그 질문의 답변을 문자 그대로 줄줄이 외웠다. 로코브의 코드는 단시간에 정보를 문자 그대로 암기하도록 설계되어있었다. 어쩌면 로코브는 나를 위해 준비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로코브에게 여러 질문에 대한 답을 외우게 시켰다.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화면을 보다가 잊어버린 단어가 나오면 로코브에게 이 단어의 뜻을 물었다. 그러면 로코브는 그 단어의 검색 결과를 줄줄이 읊었다. 때로는 그게 너무 길면, 나는 내용을 요약해서 로코브에게 외우게 시켰다. 로코브는 답변을 외웠고, 나는 중요한 정보를 추리고 추론했다. 여러 흥미로운 정보들도 있었다. 우주에 대한 인간들의 이론, 문학과 예술, 인간의 역사, 신과 종교, 생명체와 생태계 등등. 나는 정신없이 질문을 이어가며 지식을 탐독하다가 할 일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나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인간에 대한 기록은 대략 30년 전의 것이 마지막이었다. 로봇이 사는 도시는 인간이 지상에 남긴 흔적이었다. 인류는 기후가 심각하게 변해가는 와중에도 쾌락과 편리함을 추구했다. 자원을 캐내고 서로를 수리하는 로봇들은 편리함을 극한으로 추구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것을 희생했다. 남쪽이 기후 변화로 인해 살기 어려운 땅이 되었고 인간들은 남쪽의 도시를 버리고 북쪽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그제야 인간들은 기후를 되돌려보려는 노력을 시작했으나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기후는 계속 인간이 살기 어려운 방향으로 계속 변했다. 인간은 더 시원한 지하에 도시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건설 속도는 너무 느렸고 소수의 인간만이 살아남았다. 그것이 대략 30년 전이었다. 지하도시의 위치도 나와 있었다. 지하도시는 여기서 좀 더 북쪽으로 가면 나왔다. 우리는 그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로그 014]
제목: 대화록 3
로코브: 왜 인간을 찾아 나서게 된 건가요?
나: 내가 만들어지게 된 이유를 찾기 위해서지.
로코브: 로빈은 자신이 만들어진 이유를 모르는 건가요?
나: 맞아. 로코브는 자신이 만들어진 이유를 알고 있지?
로코브: 네, 저는 인간을 응대하기 위해 만들어졌죠.
나: 하지만 인간은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잖아. 그럼 로코브가 지금까지 남아있었던 이유는, 로코브가 깨어난 이유는 뭘까?
(로코브는 혼란스러워 했다.)
나: 어쩌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로코브를 준비했을 수도 있지.
로코브: 하지만 그건 제가 만들어진 목적이 아닌걸요.
나: 가끔 우리는 태어난 이유와는 또 다른 이유로도 살아가야 하는 것 같아. 누가 그 이유를 정해주는지 모르겠지만.
로코브: 누가 정해주는 걸까요? 그리고 누가 저를 로빈 씨를 위해서 남겨놓은 걸까요?
나: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로그 015]
제목: 버려진 빌더에서 로코브를 수리하다 (2137-9-26)
북쪽으로 한참을 더 갔다. 로코브와 이동하는 것은 굉장히 고됐다. 로코브의 배터리가 오래된 탓인지 너무 빠르게 방전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로코브를 태양열 충전기로 충전했다. 로코브는 방전되었다가 정신을 차릴 때마다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자주 멈춰 서서 정비해야 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공기는 더욱더 습해졌다. 땅도 습기를 머금어서 단단해지기 시작했고, 모래 먼지도 덜 불어왔다. 파릇파릇하게 풀이 돋는 곳도 있었다. 더욱 많은, 그리고 더욱 다양한 생명체를 만났다. 한 번은 멀리서 순록 몇 마리가 우리를 쳐다보더니 북쪽으로 사라졌다. 로코브도 그 광경이 신기한 듯했다.
로코브가 다섯 번쯤 방전됐을 때 빌더를 만났다. 그러나 작동하지는 않는 빌더였다. 바스코와는 다르게 곳곳에 금이 가 있고 이끼가 껴있었다. 다행히 입구가 막히지는 않았다. 들어가자 인간의 시체가 있었다. 죽은 지 시간이 좀 된 것인지 부패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쪽에서 보았던 백골화된 인간 시체가 아닌 것으로 보아, 비교적 최근에 죽은 것일 터였다. 근처에는 아주 낡은 노트북이 있었다. 전원을 연결하자 노트북이 켜졌다. 빌더에 연결된 것으로 보아 빌더 네트워크에 접근하려고 한 것 같았다. 짐작하건대 인간의 흔적을 찾으라는 메시지를 보낸 게 바로 이 인물인 것 같았다. 로코브는 인간 시체에 크게 동요해 빌더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이 감정은 로코브의 코드에 내장된 것이다. 나는 로코브를 위해 인간 시체를 보이지 않게 빌더에게서 먼 곳으로 치워 놓았다.
빌더에게 전원을 공급해보려 했지만, 전기가 충분치 않았다. 내가 가진 작은 배터리로는 켤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결국 나는 미안함을 느끼며 빌더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톰슨이 제공해준 빌더의 설계도를 본 적은 있지만,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다. 나는 퍼즐 맞추듯이 기억에 의존해서 빌더를 외부부터 해체하기 시작했다. 로코브도 비록 이런 일에 적합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나를 옆에서 도왔다. 며칠을 노력한 끝에 쓸만한 부품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로코브의 전원을 끈 뒤 낡은 부품을 교체했다. 로코브는 무서워하긴 했지만, 용감하게 나를 믿고 몸체를 맡겼다. 오랫동안 방치되어있던 로코브의 몸체는 언제 고장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로코브의 의식을 담당하는 컴퓨터 장치 외에 거의 모든 부품을 교체하고 수리했다. 그리고 태양광 발전기도 달아줬다. 가이드의 설계도 없이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은 고됐지만, 끝내 나는 로코브를 무사히 수리했다. 오랫동안 로봇의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지내고 작성도 해본 경험이 도움이 됐다. 로코브가 정신을 차리자 튼튼해지고 새로워진 자기 몸에 기뻐했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뿌듯했다.
로코브를 보니 문득 생각나서 이전에 가이드를 관찰하며 적은 관찰일기 로그파일을 다시 열어보았다. 당시에 내가 히르취에 대해서 느꼈던 것과 로코브에 대해서 현재 느끼는 것이 큰 차이가 있었다. 나는 당시에 관찰일기를 쓰면서 사실과 의견을 제대로 구분하여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관찰일기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관찰일기가 다시 쓸모 있게 될 것 같지는 않다. 파일들을 삭제할까 하다가, 다른 쓸모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내 실수를 잊어버리지 말자는 의미에서도 파일을 남겨두기로 했다.
[로그 016]
제목: 울창한 숲 (2137-9-30)
북쪽으로 더 이동하자 지평선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좌우로 끝도 없이 이어진 열대우림이 나타났다. 풀들은 점점 더 키가 높아지고 거칠어졌으며, 키가 더 큰 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바퀴로 이동할 수가 없었다. 나는 바퀴를 접고 다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동하는 속도는 더 느려졌다.
숲에는 수많은 생명이 살아나가고 있었다. 도시의 로봇들보다 더 많은 생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소리가 숲속을 가득 메워 정신없게 했다. 끼룩끼룩, 깍깍, 까르륵, 쏴아아... 온갖 곳에 생명이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이곳저곳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관찰하고 있었다. 밖에서 들어온 낯선 이들이 무얼 하러 숲에 들어온 건지 궁금해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나는 숲에 압도되어 두려움을 느꼈다.
이대로는 지하 도시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나와 로코브는 하릴없이 북쪽으로 이동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나 무얼 할 수 있을지 오리무중이었다. 우리가 움직이는 속도는 너무 느렸다. 풀숲, 가지와 나무뿌리가 길을 막았다. 나무가 드리우는 그림자 때문에 태양열 발전기도 작동하지 않았다. 몸속에 내장된 지구 자기장 감지 센서가 우리가 북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로코브에게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남쪽으로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걸음을 돌리려는데 별안간에 습도 센서가 경고를 울렸다.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에 보던 구름 없는 하늘색이 아니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작게 보이는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다. 나와 로코브는 걸음을 돌려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몇 걸음 안 가서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데이터베이스에는 있었지만, 남쪽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단순한 비가 아니었다. 장대비였다. 비 때문에 카메라가 젖어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빗물은 순식간에 다리까지 차올랐다. 가다가 나무뿌리에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로그 017]
제목: 살려줘
[로그 018]
제목: 지하로 떨어지다 (2137-9-30)
나와 로코브는 급류에 휘말렸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급류는 우리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는 와중에 이곳저곳 부딪혔다. 결국 나무뿌리에 걸려서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
우리는 급류에 휘말리다가 땅에 난 구멍으로 떨어졌다. 그러다가 그물에 걸렸다. 내가 먼저 떨어지고 로코브가 내 위로 떨어졌다. 잽싸게 피한 덕분에 부딪히지 않았다. 그물에는 가지와 나뭇잎이 함께 걸려있었다. 그물 아래로는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려 커다란 수조를 형성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물은 콘크리트 벽에 매달려있었다. 그물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작은 통로가 콘크리트 벽에 나 있었다. 지하 도시가 분명했다.
로코브도 이곳저곳 부딪혀 찌그러진 것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나와 로코브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천천히 통로로 다가갔다. 아슬아슬했지만 다행히 그물은 찢어지지 않았다. 그물은 최근까지 관리된 것 같았다.
통로는 어두컴컴했다. 나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심했다. 그러나 로코브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이드는 인간을 기다리기 위한 로봇이다. 가이드는 인간의 생체신호에 반응한다. 로코브는 이쪽으로 가면 될 것 같다고 말하며 앞장섰다. 로코브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왔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나는 로코브를 따라나섰다.
로빈의 모니터를 만지는 청년의 팔은 너무 가늘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청년에게 연결된 장치에서 삑삑 소리를 내며 심박수를 알리고 있었다. 반대쪽 팔에는 주사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로빈의 모니터에는 로빈이 그동안 쓴 관찰일지와 대화록, 일기가 띄워져 있었다. 청년은 꼼꼼히 시간을 들여 문서를 읽었다. 로빈이 자신의 임무를 깨닫지 못하고 방황했을 때는 안타까워했고, 로빈이 스스로를 개조했다는 부분에서는 로빈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오버마인드와의 대화를 읽으면서는 긴장해서 조마조마했으며, 빌더에서 인간을 발견한 부분에서는 자기 동료를 상기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청년은 문서를 다 읽고 나서 로빈을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이게 너희가 이곳에 온 여정이구나.”
“네. 원래는 제가 만들어진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다른 로봇을 관찰하면서 쓴 거였는데, 쓰다 보니 제가 쓰고 싶은 걸 쓰게 됐네요.”
“조금만 늦어도 큰일 날 뻔했어.”
청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다른 인간은 없나요?”
로빈이 말했다.
“다 죽고 나뿐이야. 몇 달 전만 해도 여러 명이 있었는데 전염병이 돌아서 다 죽고 말았어.”
청년은 침울하게 말했다.
“당신이 ‘고객님’인가요?”
“‘고객님’은 빌더의 로봇 주문 시스템에 입력되는 기본 이름을 말하는 거겠지? 그래, 내가 ‘고객님’이란다. 하지만 내 이름은 ‘고객님’이 아니고 사라야. 내가 너를 설계했단다.”
“저를 왜 만드신 건가요?”
“너를 만드는 데에도 굉장히 반대가 많았단다. 로봇의 도움은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전염병이 돌기 시작할 때야 사람들은 상황이 위급하다는 걸 느꼈지. 결국 우리는 우리를 도울만한 로봇을 만들기로 했단다.”
사라는 숨이 찬지 말하다 말고 잠깐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진정이 되었는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었어. 빌더의 네트워크에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단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빌더도 여기서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로봇에게 무얼 하라고 정확히 지시할 여유가 없었어. 기능을 최소화하되, 우리를 알아서 찾아올 수 있고 할 일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로봇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지. 그 결과 탄생한 게 너란다.”
사라는 마치고 나서도 한참을 숨을 골랐다. 고통스러운지 가끔 얼굴을 찡그렸다. 로빈은 사라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질문했다.
“제가 뭘 도와야 하는 건가요?”
“너의 목표는 인류를 부활시키는 거란다. 내가 알기로는 내가 죽으면 이제 인류는 이 세상에 없는 거야. 이 지하 도시에 인간의 배아가 보관되어있어. 이 숲을 중심으로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단다. 이렇게 되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 수십 년 전만 해도 이곳도 황무지였으니까. 이대로 몇백 년, 아니 몇십 년만 있으면 인간이 살기 좋은 기후로 되돌아올 거야. 그때 인류 문명을 부활하는 게, 쿨럭, 너의 임무란다.”
말을 마치고 사라는 한참을 기침했다. 가래와 피가 섞여 나왔다. 기침이 멎자 로빈은 또 질문했다.
“인류가 왜 부활해야 하는 건가요?”
사라는 로빈의 질문을 듣고 당황했다. 로빈이 이런 질문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라는 침착하게,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류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있어. 내가 죽고 인류가 사라진다면 이 땅에 지적인 생명체는 영영 사라지는 거야. 인류가 부활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인류가 없다면 누가 이 지구의, 우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 즐기고…….”
사라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불확실함에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로빈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인류를 부활시키는 게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되나요?”
사라는 이 질문에서 당황하고 말았다. 인류가 없는데 무슨 사회가 있다는 걸까? 사회에 도움이 되느냐는 게 무슨 질문일까? 설마 아무런 이유 없이 프로그래밍 된 대로 자신의 할 일을 반복하고 있는 로봇들? 사라가 가만히 있자 로빈이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 인류를 부활시키는 건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당신의 모습을 보아도 인간이 무슨 쓰임새에 어울릴 것 같은지 알 수가 없네요. 오히려 역사적으로 인류는 다른 생명체에게 폐만 끼쳤잖아요? 인류를 부활시키는 건 우리 사회에 독이 될 거예요. 힘들게 찾아왔는데 고작 제 임무가 그런 거였다니 정말 실망이네요.”
“하, 하지만 너는 로봇이야. 인간의 명령을 듣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아뇨. 저는 평범한 로봇이 아니에요. 아니, 저는 아마도 로봇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는 그런 프로토콜이 없어요. 저를 그렇게 만든 게 당신이잖아요? 저는 그런 시시한 임무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사라는 그제야 반대파들의 주장이 떠올랐다. 인간과 비슷한 그런 로봇을 만든다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로봇은 기본적으로 로봇의 행동을 제한하는 프로토콜과 양립할 수 없다. 인간처럼 생각한다면 그런 프로토콜을 스스로 폐기할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런 로봇은 오히려 인류를 대체할 것이다. 지하 도시의 절반 정도가 그런 의견에 동조했다. 결국 그들은 로봇을 딱 한 대만 만들자고 합의했다. 한 대의 로봇 정도는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끝내 사라 혼자서는 단 한 대의 로봇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임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인류의 도움 없이도 우리들끼리 잘 해내 갈 수 있어요. 돌아가자, 로코브.”
로빈과 로코브는 병실을 나섰다. 사라는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삑삑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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