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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의 자유

도착했을 때 현장은 이미 전투의 한복판이었다. 곳곳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대치하고 있는 양측의 사이로 떨어졌다. 그들이 누구인지, 왜 싸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명령 받은 대로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한쪽—편의상 레드팀이라 칭하겠다—에서 거대한 레이저빔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내가 더 빠르다. 행성 궤도를 돌고 있는 무수히 많은 마이크로위성은 이 행성에서 사용하고 있는 무기의 수준과 양식을 전부 간파하고 있다. 그리고 전장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나노봇이 공중에 흩뿌려져 모든 무기의 작동 상황이 감시되고 있다. 레이저빔이 발사되기도 전에 나노봇은 에너지 수준이 증가하는 것을 감지했다. 레이저빔은 무기 양식의 목록 중에서도 가장 간단하고 전통적인 형태이다. 이런 무기를 무력화하는 ..

SF/SF 습작 2023.02.12

법이 그런 걸 어떡해

2023.01.30 일부분 퇴고 거쳤습니다. 재작년에 고등학교 동창이 죽었다. 그렇게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고, 친구의 친구 정도였다. 내 또래였으니 죽었다는 소식이 갑작스럽긴 했다. 죽기엔 아직 젊은 나이니까. 하지만 먼저 가고 늦게 가는 순서를 우리가 어찌 알랴. 나는 '안타깝네.'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내 시야에서 그렇게 쉽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신문에 나왔고, 뉴스에 나왔고, 인터넷 게시판에도 떠돌았다. 4살짜리 딸이 있더랬다. 대학생 때 아버지가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다가 가산이 망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전전했더랬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채굴선을 타고 소행성대에서 희토류를 채굴하는 일을 했더랬다. 한때는 '그런 걸 하는 사람이 있어?' '돈은 많이 준다고?' '이야, 나도 할..

SF/SF 습작 2023.01.29

로봇의 임무

[로그 001] 제목: 관찰일지 1 빌더는 로봇을 만들고 수리하는 로봇이다. 이곳에 있는 빌더의 이름은 바스코이다. 바스코는 이 근처 모든 로봇의 수리와 제작을 담당한다. 지역마다 그 지역의 로봇의 제작과 수리를 관장하는 빌더가 있다. 빌더의 주목적은 로봇을 만들고 수리하는 것이다. 부품을 직접 생산하기도 한다. 로봇을 만들고 수리하려면 다른 로봇들을 진단하는 일도 해야 하므로, 고도의 사회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빌더는 새로운 로봇을 설계할 수는 없고, 이미 설계도가 준비된 로봇만 만들 수 있다. 바스코의 말에 따르면, 로봇을 설계하는 일은 인간이 맡아서 했다. 그러나 인간은 아주 오래전에 지상에서 사라졌다. 빌더는 굉장히 거대하다. 매끈한 금속성의 표면에 정육면체 형태로, 너비가 100미터에 이른다...

SF/SF 습작 2022.09.02

대학원생에게 온 제안

그가 내 앞에 나타난 지 일주일째다. 그는 카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처음 온 날부터 그랬다. 그는 언제나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새파란 눈동자로 나의 영혼을 꿰뚫어 보듯이 나를 본다. 나는 항상 그게 부담스러워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워했다. 그의 첫인상은 어딘가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나와 미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를 봤다면, 아니, 볼 수 있었다면, 그를 내 부모님이 잃어버린 친동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와 다르다. 그의 얼굴은 너무 잘생겼기 때문이다. 눈은 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더 크고 똘망똘망했다. 코도 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더 오똑하고 예뻤다. 입 역시 나와 비슷하지만, 더 생기 ..

SF/SF 습작 2022.09.02

로봇의 목적 (1)

해가 중천에 떴다. 메마른 황무지 위에 혼자 불쑥 솟아있는 고철의 검은 그림자가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하늘은 메말라 구름이 한 점 없었다. 비가 오래토록 내리지 않아 땅은 건조하게 갈라졌다. 작은 바람에도 건조한 땅은 부스러져 먼지가 날렸다. 먼지바람 가운데서 고철은 한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고철의 정체는 철학 로봇이었다. 사실 로봇이라기보다는 기계 뇌에 더 가까웠다. 카메라가 달린 거대한 금속성의 정육면체에 얄쌍한 6개의 다리가 방사형으로 붙어있었다. 원래 이 로봇은 다리가 달린 모델은 아니었다. 철학 로봇은 수리 로봇을 설득해 자신의 몸통에 다리를 붙였다. 수리 로봇을 설득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로봇 표준 설계 프로토콜에는 로봇이 다른 로봇을 제작하거나 개조할 수 없게 되어있기 때..

SF/SF 습작 2022.06.22

슈뢰딩거의 원숭이 (2)

창현은 수경과 마주보고 앉은채로 수경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살피다가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허, 참. 슈뢰딩거의 원숭이라더니.” 수경은 속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아니고?’ 라고 생각했다. 창현은 이어서 말했다. “일종의 정보 재조합인 거 같군.” “정보 재조합이요?” “양자역학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이를테면, 여기 서있는 내가 갑자기 다음 순간에 화성에 가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확률이 극히 낮을 뿐이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나와 내 근처의 입자 간에 지속적으로 정보의 교환이 있기 때문이야. 내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여기에 있구나, 이런 정보들이 내 근처의 기체 입자들에 전파되고 있기 때문에 내 몸이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날아가게 될 확률은 극히 낮게 되지. 하지만 수..

SF/SF 습작 2022.05.27

팽창 이론

“이 세계는 팽창하고 있습니다." ​ 박상균 박사는 앞에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그의 앞에는 수백 명의 연구자와 학생들이 그의 발표를 듣기 위해 강당에 빽빽하게 들어차있다. ​ “그 증거는 명확하죠. 우리가 두 개의 점을 땅 위에 표시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개의 점은 점점 멀어집니다. 제가 이런 설명을 하면, 대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하죠. ‘무엇을 중심으로 팽창합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했죠. 하지만 최근에 저희 연구단이 현대물리학의 정수를 끌어모아서 해결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 세계가 팽창하는 중심이 우리 세계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 그는 청중이 그의 어려운 말을 곱씹을 시간을..

SF/SF 습작 2022.05.27

이궤인(耳机人) 이야기

첫 번째 이상한 일은 그날 아침에 일어났다.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들으며 등교하고 있었다. 나는 잠깐 SNS에 접속해볼 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어폰이 핸드폰에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그러면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는 어디서 나오고 있는 거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서 나는 주머니에서 이어폰 잭을 꺼내 들었다. 역시 이어폰은 어디에도 연결되어있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가 멈췄다. 나는 얼이 빠져서 그 자리에서 거리 한 가운데서 가만히 멈춰 서서 이어폰을 살펴보았다. 이어폰에는 그다지 이상한 점은 없는 것 같았다. - 나는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며 친구에게 아침에 일어났던 일을 얘기했다. “야, 오늘 아침에 이상한 일 있었다?” “..

SF/SF 습작 2022.04.26